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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방/◆양희은◆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아침이슬)

by Lee.y.s 2021. 7. 4.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아침이슬)
제조회사 : 1971.유니버샬 KLS-26

SIDE 1
 
1. 아침이슬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EEE13359EC1D8D22
2. 엄마 엄마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74003359EC1D8F2C
3. 세노야 세노야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BC2B3359EC1D9215
4. 그날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639B3359EC1D951B
5. 사랑의 기쁨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88F13359EC1D9819
 
SIDE 2
 
6. PUFF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81363359EC1D9B07
7. SEVEN DAFFODILS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1D6F3359EC1D9E0E
8. TRY TO REMEMBER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7B2A3359EC1DA13D
9. BOTH SIDES NOW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84C53359EC1DA42B
10. ALL MY TRIALS LORD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99D5633359EC1DA701

 

(Smart Phone)

요약 

1971년 발표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 「고운노래 모음」은 엄혹한 시대를 상징하는 <아침이슬>을 최초로 선보인 포크 명반이다. 
1970년대 한국 포크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음반이며, 수록곡 <아침이슬>은 강한 연대 의식을 담은 국민가요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한국 포크의 전설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
김민기와 양희은은 1970년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홀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빚어낸 포크송은 대중가요의 범주를 뛰어넘어 엄혹했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1971년 봄, 대한일보 강당 무대. 공연이 끝날 즈음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동급생 김아영이 양희은에게 <아침이슬>의 악보 조각을 건넸다. 
조각난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지금껏 간직할 만큼 <아침이슬>은 양희은을 감동시킨 최초의 노래였다. 
재수 끝에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한 양희은은 1971년 6월, 방송인 이해성, 신태성, 김병우의 주선으로 명동 사보이호텔 뒤에 있던 
라이브클럽 오비스 캐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청순한 외모, 마음을 사로잡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 탁월한 가창력은 
그를 단숨에 명동 다운타운가의 인기 가수로 만들었다.

녹음에 참여한 명동 YWCA 청개구리홀 멤버들
 
소문을 듣고 명동 오비스 캐빈에 찾아온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양희은은 음반 취입 기회를 잡았다. 
서울 뚝섬 마장동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 녹음을 위해 김민기, 김광희, 이용복 등 명동 YWCA 청개구리홀 멤버들이 모였다.
 
음악적 중심을 이룬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장안의 화제가 된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 파트를 맡아 녹음을 마쳤다. 이용복은 “당시 김민기가 창작한 곡을 잘 몰라 즉흥적인 애드리브로 따라갔다. 
양희은의 참신하고 맑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진짜 포크 음반이 탄생한다고 느꼈다”라고 회고했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명반의 탄생
 
음반에는 김민기가 창작한 <아침이슬>, <엄마! 엄마!>, <그날> 3곡과 서울대 작곡과 학생 김광희의 창작곡 <세노야 세노야>, 
명동 라이브클럽 오비스 캐빈에서 양희은이 주로 불렀던 <일곱 송이 수선화>, <Puff> 등 6곡의 팝송 번안곡까지 총 10곡이 수록되었다.
 
1971년 9월, 남산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서 촬영한 재킷 사진에 담긴 포크 대모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인 모습은 순수했고 당당했다. 
맑고 청아한 보컬로 들려준 환상적 콤비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노랫말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고운노래 모음」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명반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능가하는 양희은의 순수한 보컬 역시 
그의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청년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아침이슬>이 빚은 시대의 해프닝
 
타이틀 곡 <아침이슬>은 시적인 가사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1973년 군사정부가 주는 고운 노래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5년 갑자기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 체제 찬반 국민투표 날, 투표 반대 집회에서 학생 시위대가 <아침이슬>을 부르기로 한 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시중에 배포된 양희은의 앨범을 포함해 김민기의 노래가 수록된 모든 앨범은 압수 후 폐기되었다. 
당시는 모든 대중가요 음반에 의무적으로 건전가요 한 곡을 넣던 시기였다. 금지곡 <아침이슬>이 건전가요 
리스트에도 등재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수록곡 중 김광희 곡 <세노야 세노야>를 제외한 
김민기의 모든 창작곡은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의 노래에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금지 사유가 있던 것과 달리 
<아침이슬>의 금지엔 아무 이유조차 없었다. 세간에서는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 인사를 암시한다”라는 억지 해석까지 나돌았다.
 
국민가요로 거듭난 <아침이슬>
 
양희은은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 출신 박인희, 라나에로스포 출신 은희, 최안순 그리고 이연실, 방의경과 함께 
1970년대 청년 문화를 주도한 1세대 여성 포크 가수로 평가받았다. 그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항 가수의 상징이 되었다.
 
“저항적 의미보다는 그저 아침이슬의 이미지를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작곡자 김민기의 덤덤한 작곡 후기와는 상관없이 
1970~1980년대 민중은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이 노래가 지닌 맑고 순수한 이미지가 민주화 운동에 제격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금지곡은 대학생들의 시위 현장, 소외된 노동 현장, 각종 모임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는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후 <아침이슬>은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지금도 각종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며 
강한 연대 의식을 안겨주는 국민가요로 애창된다. “1만 번도 넘게 불렀다”라는 양희은의 증언처럼 <아침이슬>은 
한국인이 ‘가장 즐겨 듣는 대중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양희은 1집 「고운노래 모음」은 2008년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67위를 차지하며 1970년대를 상징하는 한국 포크의 클래식 앨범임을 증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 양희은 (가요앨범 리뷰, 최규성)